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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와 삶/국민 경제 48

원조를 받던 국가에서 원조하는 국가로

유엔 개발 계획UNDP 한국 사무소가 2009년 말에 문을 닫았다. 이 사무소는 1963년에 설치되어 50년 가까이 우리나라에 농업과 과학 기술, 교육 분야 등의 원조 사업을 벌였던 곳이다. 우리나라는 경제 협력 개발 기구OECD 산하 개발 원조 위원회DAC(Development Assistance Committee)에 가입하면서 원조 공여국이 되어 50여 년간 원조를 받아 온 국가에서 원조하는 국가로 전환한 첫 사례로 꼽히게 되었다. 우리나라의 DAC 가입은 국제 사회의 원조 역사에 큰 획을 그은 사건으로 평가받는다. 우리나라는 1945년 광복 이후 줄곧 원조 대상국 신세를 면치 못하였으나 눈부신 경제 발전과 함께 1995년 유엔이 운영하는 세계은행의 원조 대상국 명단에서 빠졌으며, 이후 14년 만에 ..

경제 성장으로 1인당 소득 수준이 선진국 대열에 올라서다

우리 나라의 1인당 소득 수준은 2009년 기준으로 1인당 소득 수준이 가장 높은 룩셈부르크와 비교하면 절반에 약간 못 미치고 미국과 비교하면 약 3/5에 그치는 수준이다. 이는 세계 200여 개국 중 20위권에 속하는 것으로, 경제 규모가 15위에 있는 나라임을 고려할 때 아직 미약한 수준이라고 볼 수 있다. 1980년에만 해도 우리 나라의 1인당 소득 수준은 세계 50위권에 불과했다. 그러나 우리 나라는 고도성장에 힘입어 1990년에 40위권으로 진입한 데 이어 2000년에는 세계 30위권으로 올라설 정도로 1인당 소득 수준이 높아졌다. 우리 나라의 1인당 소득 수준은 이후에도 꾸준히 상승하여 2009년에는 20위로 올라섰다. 이에 따라 우리 나라는 개발 원조 위원회DAC에 가입하여 50여 년간 원조..

지속적인 성장으로 경제적 위상이 높아지다

우리나라가 생산하는 재화와 서비스의 시장 가치를 비교하면 우리 나라의 경제 규모를 파악할 수 있다. 우리 나라의 경제 규모는 2009년을 기준으로 세계에서 15번째로 크다. 경제 규모가 가장 큰 미국은 세계 경제의 24.5%를 차지하고 일본, 중국, 독일 등 3개국이 23.0%를 차지한다. 이어 프랑스, 영국, 이탈리아, 브라질, 에스파냐, 캐나다, 인도, 러시아, 오스트레일리아, 멕시코, 한국, 네덜란드 등 11개국이 25.1%를차지하고 그 외의 국가들이 나머지 22.8%를 차지한다. 1970년에만 해도 우리 나라의 경제 규모는 세계에서 30위권에 불과하였다. 그러나 우리 나라는 이후의 고도 성장에 힘입어 1980년에 20위권으로 진입한 데 이어 1990년에는 세계 15위로 경제 규모가 커졌다. 200..

1997년의 우리나라 외환 위기

1997년 7월 타이에서 시작된 외환 위기의 불길이 우리 경제로 옮겨 붙기 시작했다. 그 해 11월에 들어서면서 환율이 크게 불안해지기 시작했고, 이에 위기감을 느낀 정부가 외환 시장에 엄청난 양의 달러를 풀었지만, 환율은 하루가 다르게 치솟았다. 그 이전까지 줄곧 900원대를 유지하던 대 달러 환율이 12월에는 종전의 두 배가 넘는 2,000원 수준까지 뛰어올랐다. 정부는 상황을 제대로 판단하지 못한 채 계속 달러를 시장에 내다 팔았고, 그 결과 외환 보유액이 거의 바닥나 국가 부도 진전의 위급한 상황을 맞게 되었다. 이 외환 위기는 우리 경제에 엄청난 충격을 가져다주었다. 지난 20여 년 동안 7%에 가까운 수준을 유지해 왔던 경제 성장률은 1998년에 이르러 - 5.7%로 곤두박질 치고 실업률도 7..

1990년대와 2000년대 두 차례의 위기를 겪은 후, 경제 성장 잠재력이 낮아지다

1990년대 중반 이후에는 그동안 누적되어 온 기업과 금융 기관의 부실 문제가 불거졌다. 한쪽에서는 국민 소득이 1만 달러를 넘어섰다고 샴페인을 터뜨렸지만, 다른 쪽에서는 기업의 채무 상환 능력이 취약해진 생태였고, 금융 기관은 부실해진 기업의 문제를 그대로 떠안게 되었다. 그러던 중 타이에서 시작된 외환 위기가 1997년 말 우리나라에 번지면서 지난 20여 년 만에 처음으로 마이너스 성장을 기록하고 실업률도 높아지는 등 경제적 시련을 겪었다. 그 시기를 거치는 동안 국내 경제 상황은 물론 우리나라를 둘러싼 경제 환경이 크게 변화하였다. 세계화 추세 속에서 자본 및 외환 자유화가 진전되었고, 중국이 경제 대국으로 급부상하면서 가격 경쟁력만으로는 수출 시장을 확보하기가 어려워졌다. 2000년대 이후 우리나..

1980년대, 기술 경쟁력을 갖추려고 노력하다

1980년대에 들어서면서 선진 기술의 모방과 저임금 노동에 의존하는 것으로는 경쟁력을 확보할 수 없게 되었다. 과학 기술에 대한 선진국 간의 경쟁과 협력이 확대되면서 기술 보호주의가 강화되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환경 변화로 기업들은 본격적으로 연구 및 개발을 통한 기술 경쟁력 확보에 나서기 시작하였다. 1980년대 중반 이후에는 소위 '삼저 호황'에 힘입어 대규모의 무역 흑자와 함께 반도체, 컴퓨터, 통신 기기 등 첨단 산업이 크게 발전하여 물가 안정 속에 고도 성장을 이어 갈 수 있었다.

1970년대, 중화학 공업을 육성하다

1960년대에 우리나라의 성장을 주도한 산업이 경공업이었다면 1970년대에는 철강, 기계, 조선, 전자, 화학 등 중화학 공업이 성장을 이끌었다. 이 시기에 창원, 여천, 구미 등지에 공업 단지를 조성한 것은 유사한 업종을 동일 단지에 입지시킴으로써 시너지 효과를 높이려는 것이었다. 1970년대 초반과 후반에 석유 파동으로 물가 급등과 같은 경제적 타격을 입기도 하였으나 대외 지향적 공업화를 추진한 결과 1960년대 초에는 세계에서 0.1%에 불과했던 우리나라 수출의 비중이 1970년대 말에는 1% 수준에 육박하였다. 이 시기에 수출 증대와 중화학 공업 육성을 최우선 과제로 삼은 결과 짧은 기간 동안 높은 경제 성장을 이루어 냈으나 한편으로는 농업 부문의 더딘 성장, 중소기업의 위축, 소득 격차 확대, ..

한국 경제 발전사 1960년대, 수출 주도형 성장을 추구하다

우리나라는 선진국들이 1~2세기 동안 이룩한 산업화를 불과 30~40년 만에 성취하였다. 광복 이후 분단과 전쟁을 거치면서 생산 기반이 취약해진 우리나라는 외국의 원조에 의존한 채 빈곤에서 쉽게 헤어 나오지 못하였다. 1950년대까지는 원조 물자를 가공하는 소위 삼백三白 산업, 즉 밀가루, 설탕, 면직물 산업이 발달하여 수입을 대체할 수 있는 소비개 산업이 발달하였지만 빈곤의 악순환을 끊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우리나라는 1960년대 들어 수출 주도의 성장 우선 정책으로 전환하면서 본격전인 성장궤도에 들어섰고, 1970년대까지 수출 규모가 연평균 30% 이상 증가할 정도로 급성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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