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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과 삶/펼쳐진 문학세계 49

고려 시대에는 왜 열녀문이 없을까?

시집살이, 처가살이? 고려 시대에는 여자가 결혼을 하더라도 시집살이를 하지 않았다. 또한 고려 시대에는 남자가 처가살이를 하여도 창피하지 않은 문화를 갖고 있었다. 고려 여인은 과부가 되면 친정에 돌아와 살아도 전혀 흉이 되지 않았고, 재산 상속은 당연히 남녀가 균등하였다. 재혼한 충선왕 고려 시대에는 이혼이나 재혼도 비교적 자유로웠다. 고려 26대 충선왕의 부인 허씨許氏는 전 남편에게서 3남 4녀를 낳고 그 7남매를 데리고 와서 왕비가 되었다고 한다. 이쯤이면 고려 시대의 사회 분위기가 어떠했는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남녀 차빌의 상징, 열녀문烈女門 예술인가, 외설인가? 고려 시대의 개방적 문화는 고려가요의 가사에 잘 나타나 있다. 조선 시대 한글의 창제와 함께 고려가요를 정리하여 문자화하려는 작업..

대동강에는 지금도 이별의 눈물이 흐르고 있을까?

서경西京, 그 영광과 비운의 도시 서경西京은 고조선· 고구려 이래전통을 자랑하는 곳인 데다가,북방의 요충지여서 고려 건국 초부터 중요시되었다.고려 예종은 서경의 체제를수도 개경開京과 같게 하였다.따라서 서경 출신은 자기 고장에 대한 자부심을 가지고,개경에 진출해서도 기존 세력에 대한 비판자 노릇을 하였다.이런 상황에서 묘청妙淸이 개경 정부에 대하여반란을 일으켰다가 패하자, 서경도 쇠퇴의 길을 걷게 되었고,이름도 평양平壤으로 바뀌었다. 고려가요에 나타나는 대동강 나루는 이별의 아쉬움이 흐르는 곳이다. 가끔은 만남의 기쁨이 담긴 노래도 있으련만, 통 보이지 않는다. 문학은 이별을 더 가슴에 껴안은 모양이다. 정지상의 한시 '송인送人'과 고려가요 '서경별곡'은 대동강을 배경으로 한 이별 노래이다.

조신調信의 꿈 - 불교적 무상관

이 작품은 세속적 욕망은 덧없는 것이며 고통의 근원아라는 불교적 무상관無常觀을 '현실-꿈-현실'의 환몽적 구조로 형상화한 설화이다. 이와 같은 환몽 구조를 이해하고, 이 작품이 후대 작품에 어떠한 영향을 주었는지 살펴보자. '조신의 꿈'은 주인공 조신이 사모하던 여인과의 인연을 이룸으로써 오히려 견디기 어려운 불행과 고통에 빠지는 것을 꿈으로 보여 준다. 이를 통해 우리는 인생의 즐거움에 대한 욕망은 순간의 꿈에 불과하고, 오히려 인간이 겪는 고통의 근원이기 때문에 그러한 욕망을 버려야 한다는 가르침을 얻을 수 있다. 이 설화는 '꿈꾸기 전의 절실한 소망 -> 꿈 속에서의 체험 -> 깨어난 뒤의 각성'기라는 액자額子 형태의 환몽 구조를 보여 주고 있다. 이처럼, 평소의 어떤 생각 때문에 꿈 속에서 일련의..

'처용가'의 배경 설화 - 처용의 관대

평소 처용의 아내를 탐하덕 역신이 어느 날 밤 처용의 집에 몰래 들어가 그의 아내를 범하였다. 처용이 밖에서 돌아와 잠자리에 두 사람이 있는 것을 보고서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며 물러났다. 이 때 역신이 모습을 드러내고 처용 앞에 꿇어 엎드려 말하기를 "내가 공의 아내를 흠모하여 죄를 범했습니다. 그런데도 공은 노하지 않으니 그 미덕에 감복했습니다. 지금 이후로는 공의 얼굴을 그린 것만 보아도 그 집에는 들어가지 않기로 맹세하겠습니다." 하였다. 이후로 사람들은 처용의 모습을 문에 붙여 사악한 기운을 물리치고 경사스러운 일을 맞았다고 한다.

처용가處容歌 - 신라 시대 시가

향가는 향찰로 기록한 신라 시대의 시가로서, 고대 가요와 마찬가지로 배경 설화를 가지고 있다. '처용가'는 처용이 그의 아내를 범하는 역신疫神을 보고, 이를 물리치기 위해 부른 8구체 노래이다. '처용가'를 통해 향가가 문학사에서 어떤 의의를 지니는지를 생각해 보자. 『삼국유사』의 '처용랑망해사' 편에 실려 전하는 이 작품은 역신疫神을 물리치기 위한 노래이다. 용왕의 아들로 신라 경주에 와 있던 처용은 역신이 자기의 아내를 범하는 현장을 목격하고 이 노래를 불렀다고 한다. 이러한 처용의 관용적인 태도에 감동을 받은 역신은 물러나면서 그의 얼굴이 붙여진 곳에는 나타나지 않기로 하였다. 이 노래와 관련된 '처용무處容舞'는 고려와 조선을 거쳐 현대에도 전해지고 있다. 처용무는 가면을 쓰고 잡귀를 물리치는 의식..

한자의 전래와 기록 문학의 발달

고구려, 백제, 신라의 삼국 시대를 거쳐 통일 신라 시대에 이르면서 우리 민족은 보다 발전된 문화를 형성하였다. 이 시기에는 행정·군사·신분 제도 등의 국가 체제가 정비되었고, 불교가 유입되어 국가의 통치 이데올로기로 자리잡았으며, 한자가 전래되면서 기록 문화가 정착되었다. 삼국 및 통일 신라 시대의 시가 문학 중에서 오늘날 기록으로 남이 있는 작품은 주로 한시와 향가이고, 서사 문학의 중심에는 설화가 놓여 있다. 한자가 전래되면서 한문 문학을 창작하는 귀족이 대거 등장하였다. 동아시아의 공동 문어인 한자를 사용한 문학 활동은 삼국 시대의 문학이 우리 민족 중심의 문학에서 벗어나 문화적 보편성을 지향했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이 시기에 고시와 절구, 율시 등 다양한 형식의 한시가 지어졌고, 전傳이나..

집단 가요와 건국 신화의 발생

원시·고대 시기는 우리 민족이 만주 및 한반도 지역에 정착하여 고대 국가를 거쳐 삼국은 건설하고, 왕권 중심의 고대 통일 국가 체계인 통일 신라 시대까지를 가리킨다. 이 시기의 문학은 한국 문학을 형성하는 초기 단계에 해당한다. 이 시기에는 신화와 서사 무가, 영웅 서사시, 주술요, 노동요 등과 같은 구비 문학과 관련된 갈래들이 존재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고대 국가에서는 농업 생산과 관련된 다양한 제천 의식을 벌였다. '국중대회'라고도 불린 제천 의식은 농사가 잘 되게 해 달라고 굿을 하면서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면서 국가 단합을 꾀한 공동체적 종교 의식이었다. 부여의 '영고', 고구려의 '동맹', 예의 '무천' 등이 대표적이다. 하늘을 향해 풍요를 기원하면서 여러 날 동안 노래와 춤을 즐겼다는 기록으로..

문학·예술의 제의祭儀 기원설

문학과 예술은 제의祭儀로부터 분화되어 발전하였다. 원시 단계의 문학과 예술은 노래와 음악, 춤이 한데 어우러져 사냥이나 제천 의식이 행해지던 곳에서 연희되었는데, 이를 원시 종합 예술이라고 한다. 이로부터 서정시와 서사시, 그리고 연극이 분화되어 발전하였다. 아직 문자가 발생하지 않았기 때문에 구전 문학의 형태로 전파·전승되었는데, 기록 문학은 한참 뒤의 일이다. 제주도 신양 영등굿 무당은 춤을 추면서 노래도 하고 사설을 외면서 굿판을 연다. 원시 부족 국가 시대에 무당은 사제이자 왕이기도 했다. 굿판에서는 노래와 춤, 그리고 각종 놀이가 연희되었다. 그 노래와 노랫말은 어떠했으며, 춤과 묘기는 어떻게 변했을까? 하회 별신굿 탈놀이 문화재로 전해 내려오는 하회 마을의 탈놀이는 무격巫覡(박수무당)들이 별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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